성형칼럼
제사가 많아서 참 좋겠다!“ (제사와 생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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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압구정필
조회 1,146회 작성일 19-01-04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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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가 많아서 참 좋겠다!“
(제사와 생신)


음력 11월 24일...
무슨 특별한 기념일이냐고? (양력도 아니고 더구나 또 12월24일도 아니고.)
다름 아닌 우리 조부님 기일이다.
그런데 내 기억엔 놀랍게도 엄청 추운 날이다.
 



양력 아닌 음력인데도 그날만큼은 정확하게 해마다 어김없이 아주 아주 추운 날이 된다. 내가 철부지 이후로 조부님 기일을 알게 된 후 단 한 번도 춥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까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닌가? 금년(양력 2018년 12월 30일))에도 역시 어김없었다. 불과 3-4일 전까지만 해도 영상 10도 정도로 포근하여 봄 날씨를 의심하였다. 막내 동생은 불과 일주일 전 최 북단 양양에서 땀 흘리며 골프까지 쳤다지 않은가?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틀 전부터 영하로 떨어지더니 기일엔 어김없이 또 영하 10도 밑으로 내려 가버렸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우리집은 다른 집들보다 제사가 많았고 따라서 젯상 차릴 일도 많았다.. 일년에 설날과 추석 빼고도 4차례가 넘었으니까. 선친(아버님)께서는 생존하는 남자 형제가 없었던 탓에 젯상을 준비해야하는 며느리라곤 어머님 단 한 분 뿐이었다. 새색시로 갓 시집오셨을 40-50년대는 태평양전쟁으로 일제의 착취가 극심했었고 그 후 한국전쟁, 그리고 반복되는 흉년 등으로 누구나 가난과 기근에 시달리는 시대였다. 없는 살림에 철마다 반복되는 제사가 반가울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 혼자뿐인 며느리, 17세 꽃다운 나이에 시집온 새색시 어머님께선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지만 참 알 수 없는 건 그 당시 어머님께선 전혀 싫거나 힘든 내색이 없으셨던 것으로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다. 이 기억은 나중에 들은 동네 어르신들의 기억과 일치하니 사실일 것이다. 하긴 어머님께서 불평이나 신세 탓을 한다고 누가 들어주고 이해해줄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별 수 있었겠는가. 일 년동안 수차례 제사가 끝나갈 무렵 그해 세밑이 되면 드디어 조부님 제사가 마지막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 마지막 제사엔 어김없이 동장군이 맹렬한 추위를 몰고 오곤 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조부님께선 돌아가실 때에도 엄청 눈이 많았고 추웠다는 말을 들었는데, 적어도 내가 철이 든 후로 매년 그 기일마다 춥지 않은 그것도 맹추위가 아니었던 날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엄동설한에 얼어터질 듯한 손가락 호호 불어가며 시부님 젯상을 마련하시느라 얼마나 애쓰셨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철부지 나는 제사 때마다 신이 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마을 어귀까지 고소한 기름 냄새가 퍼지고 평소 접하지 못했던 고기, 해산물이며 갖가지 나물과 또 여러 가지 과일이며 특히 아이들이 좋아하는 곶감도 맘껏 먹을 수 있지 않은가! 그 중에서도 내가 눈독을 들이는 것이 또 한 가지 있었다. 옛날 오래된 성곽 지붕마다 뾰쪽뾰쪽하게 솟은 첨탑처럼(또는 여왕의 왕관처럼) 칼질하여 장식해 놓은 삶은 달걀이 그것이었다. 어머님의 그 예쁜 작품은 어릴 적 내 눈에도 참 멋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러나 상을 차릴 때부터 꼴깍 군침을 흘리는 나에게 행여나 제사 모시기 전에 손을 댈까봐 어머님께선 제사가 끝날 때까진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주셨다. 요놈! 하고 할아버지께서 호통을 치실 테니까. 그 아름다운 삶은 달걀을 맛보려는 욕심에 졸리는 눈을 억지로 비비고 후비고 겨우 자정 넘어 제사가 끝난 후 맛보는 그 작품 맛이란... 몰아치는 북풍에 뒤안의 대나무들이 쉬익쉬익 내는 소리와 함께 매섭게 차가운 겨울밤을 아름다운 기억 속에 자리잡게 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날 아침이었다.
제사가 있은 다음날 아침에는 으레 장만했던 음식들을 동네 친지 이웃들에게 집집마다 돌리는 일이었다. 그 몫이 누나와 나의 몫이었다(동생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마을 50여 가구 중 내 차례는 7~8가구였지만 엄청 추운 이른 아침에 더군다나 눈이 쌓여있는 날이 많았다. 어린 나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어서 솔직히 말하면 정말 내키지 않았다, 물론 가는 집집마다 고맙고 착하다며 볼과 머리를 쓸어주는 바람에 새빨갛게 언 볼이 조금 따스해지는 걸 느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힘든 제사가 자주 있다는 것을 부러워하는 녀석이 딱 둘 있었다.
“제사가 많아서 참 좋겠다!”고.
“자주 떡도 먹고 곶감도 먹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 테니까...참 부럽다!”
제사가 많은 걸 부러워하는 그중 한 녀석은 이ㅇㅇ(이미 작고했다 함)로 내 동갑이었다, 걔네 집은 온 식구가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제사를 모시지 않아 젯상을 차리지 않는단다. 또 한 녀석은 바로 옆으로 두 집 건너 살던 조ㅇㅇ녀석이었다. 나와 역시 동갑인 걔네는 아주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도 살아계시고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큰집에서 제사를 모시므로 걔네 집에선 모실 제사가 아예 없었던 모양이다. 제사가 끝나고 얼마동안 나는 신이 나곤 했다. 집안에 떡과 과일, 곶감은 물론이고 맛있는 음식들이 남아 있어서 맘에 드는 또래 녀석들을 불러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마다 나는 자랑스럽고 흐뭇한 기분이 들어 은근히 뻐기곤 했다. 그러나 젯상 차릴 때까지 다리가 아플 정도로 많은 심부름을 해야 했고 또 제사 후에는 집집에 음식 돌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너댓 살 무렵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아침 이었다
제사가 많은 우리집을 무척 부러워하던 바로 그 조ㅇㅇ녀석이 쟁반에 음식을 들고 왔다.
어머님께서 반가이 받으시며,
“웬일?”하고 물으셨던 것 같다.
자랑스럽게 쟁반을 건너던 이 녀석 왈,
“아버지 제사래요.”
“뭐라고? 아버지 제사라니?...오우 아버지 생신이겠지! 하하하”
“살아계시면 생신이고 돌아가신 분은 제사란다!”
어머님 말씀에 머리를 긁적이던 녀석은 얼굴을 붉히며 대문 밖으로 달아났다.
평소에
“제사가 많으면 맛있는 걸 자주 먹을 수 있을 텐데...우리는 제사가 없어서 안 좋다.”
라며 부러움 섞인 푸념을 했던 그 녀석! 그래서 자기네도 제사가 있으면 좋겠다고 그것도 우리집처럼 많으면 좋겠다던 그 철부지 녀석이 생신과 제사를 혼동했을 수도 있겠거니 이해를 하면서 나홀로 속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 늘 동분서주하며 그 젯상을 준비하셨던 모습의 우리 어머님을 여읜지 벌써 20년이 지났다. 그러나 제사가 있으면 아니 많으면 좋겠다던 그 친구, 제사가 많으려면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그만큼 많이 떠나보내야 한다는 걸 몰랐던 그 철부지 순박한 친구, 아버지 생신을 제사라고 했던 그 친구는 효성이 깊어서인지 그의 어머님은 우리 어머님보다 20년을 더 사시고 금년에 작고하셨다.

이번 조부님 기일을 앞두고는 넘 포근한 날씨의 연속이었다. 이러다간 난생 처음으로 포근한 기일을 맞게 되는 것이 아닌가 조바심 속에 기대를 해봤다. 웬걸! 역시나 금년들어 가장 추운 기록이 되고 말았다. 이 추운 날씨에도 젯상 준비에 어머님이 그랬던 것처럼 동분서주하는 조부님 손자며느리들을 보면서 뭔가 울컥함을 억제할 수 없었다. 물론 옛날 어머님처럼 혼자서 준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혀 뵌 적 없어서 조부님의 얼굴도 모르는 그런 손자며느리들이 새삼 고맙기도 하고, 아직까지도 그런 수고를 너무도 당연시 여겨왔던 나의 무심한 태도가 밉기도 했다.

옛날 혼자서 이 추운 날 젯상 준비에 부엌과 안방을 발이 닳도록 들락거리셨던 곱디 고운 자태의 우리 어머님 생각-지금도 “어머니, 저희 왔어요!“라고 부르면 금방 맨발로 달려 나오셔서 “오우~ 우리 자식들!“ 당장 얼싸안아 주실 것만 같은 어머님 생각을 간절하게 하는 것은 조부님 기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귀여운 며느리 사랑스런 당신의 며느리를 하늘에서도 더욱 사랑해 주시고 계시겠지요? 제사가 많으면 참 좋겠다던 당신 손자의 그 친구가 엊그제 세밑 인사를 문자로 보내왔네요. ”세상 살기 너무 좋아졌으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자고.“ 요.

조부님 제사가 지나니 언제 그렇게 추웠느냐는 듯 다시 날씨가 포근해져 간다.
(2018년 12월 31일)

의술과 예술의 만남 김잉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