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형칼럼
봄을 기다리는 마음(천둥이 할머니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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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52회 작성일 02-10-25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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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상님예!』『아 선상님예! 나좀 보입시다.』
2층 계단을 오르다 무심코 돌아봤으나 헐떡거리며 따라온 할머니는 결코 알만한 얼굴이 아니었다.
『선상님은 나를 모르겠능기요?』
할머니답지 않게 빨갛게 상기된 볼을 한 채 내 턱밑에 디미는 얼굴을 바라봤지만 역시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선상님이 그 김선상 맞지예?』
까운 위의 이름을 짚으면서 머리를 갸웃거리는 내가 안타깝기라도 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 다시 할머니 얼굴을 응시하니 어디선가 본듯하기도 하고 또 낯설기도 하고 하였다.
『네 맞습니다만..........무슨 일로?........ 』
『야! 이 김선상, 너무 한데이, 내가 바로 이천둥이 할무이라카이......』하며 곁에 서있는 6세가량의 사내아이 머리를 툭 쳤다. 제법 똘똘하게 생긴 녀석은 할머니가 시키는데로 나에게 꾸벅하고 절을 하였다. 그제서야 번개처럼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래요? 이 천둥이..........』
맞다! 맞아! 나는 대견한 것을 발견이라도 한 듯 버럭 큰소리를 지를 뻔 하였다.
× × ×
그 해 여름은 일찍 시작되어 5월하순께였는데도 산부인과 중환자처치실은 무더웠고, 밖에는 이삼일 전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인턴인 나는 벌써 이틀낮, 이틀밤째 언제 다시 혼수상태에 빠져들지 모르는 자간증 임산부를 병상옆에서 KEEPING하고 있었다. 혈압, 맥박 및 호흡수 등을 때로는 5분마다 10분마다 15분, 30분.....이런 식으로 체크하다가 위험신호가 나타나면 즉각 담당레지던트에게 보고해야 하는 것이 내 임무였다.(그 당시 내가 인턴, 레지던트 생활할 때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혈압, 맥박, 호흡수 등을 자동 측정하는 활력징후모니터(vital sign monitor)가 없었으므로 중환자가 발생하면 의사나 간호사가 환자 곁에서 지키고 앉아서 수시로 일정 시간마다 직접 체크하고 기록했어야 했음). 이 임산부는 내가 48시간째 맡는 동안 벌써 3번씩이나 혼절해 상당히 위험한 상태로서, 레지던트 눈을 피하지 않더라도 양심상 도저히 자리를 뜨고 담배 피울 여유조차 없었다. 또한 처치실 바로 밖에는 주야로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남편 등 가족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환자의 상태가 잠시 좋을 때도 드나들기가 사실상 민망하였다. 임산부의 남편은 2대독자인데다가 현재 딸만 둘을 두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반드시 아들을 얻어야 한다며 모두들 극성스럽게 정성을 다하고 있다고 간호원은 나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이틀째 밤을 새던 내가 깜박 임산부 팔에 얼굴을 묻은 채 졸고 있던 중 간호원이 희소식을 가져왔다. 분만실로 옮긴다는 것이다. 나는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저녁 회진때, 주야로 고생(?)하는 나를 보기가 안됐던지 치프레지던트는 분만후엔 하루동안 실컷 낮잠을 즐기도록 해주겠다고 위로했었기 때문이다. 분만을 돕는 나는 신이 나면서도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정
시킬수가 없었다. 2박2일을 꼬박 애쓴 보람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순산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이왕이면 사내아이였으면 하고 빌었다. 이 긴장의 순간 갑자기 번개가 번쩍하더니 우르르 꽝! 꽝! 하는 천둥소리와 함께 으앙! 하면서 드디어 새 생명이 탄생하였다. 하마트면 붙잡고 있던 손을 놓쳐 야단을 맞을 뻔 하였다.
산모는 회복실에 옮겨져 다시 나는 혈압 등을 체크하고 이제 내 임무가 끝났다는 해방감에서 휘파람이라도 불고싶은 심정으로 분만실 문을 열고 보호자 대기실을 지나려 했다. 시어머니인 듯 한 할머니가 대뜸 소매를 붙잡고 궁금증을 풀고자 했다. 나는 의기양양하여 마치 내가 주치의인 것처럼 순산하였으며 더구나 고추였다고 말하자 가족들은 박수를 치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그 당시에는 초음파기기가 등장하기 전이라 출산 전에 미리 성별을 알 수가 없었음). 나는 한술 더 떠서,
『그놈 큰 인물이 될 모양인가 봅니다. 번개치고 천둥칠 때 태어난걸 보니까요....... 아참 귀한 아들이라 했죠? 그럼 천둥이라고 이름지으세요. 천둥칠 때 태어나고 또 귀한 자식일수록 이름을 개똥이 마당쇠 등으로 천하게 지어야 튼튼히 자라고 오래 산다던데요.』
웃음소리와 고맙다는 인사를 뒤로 한 채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마냥 가벼웠다. 세끼 모두 걸른 채 잠을 즐긴 후 저녁에 일어나 다시 산모들의 혈압등을 체크하는 일을 맡았다. 물론 천둥이(?)엄마도 내가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 산모 40여명을 대개는 하루에 서너번 체크하면 되었으나 자간증의 위험에서 소생한 천둥이 엄마는 예외로 2시간마다 체크하라는 지시였다.
천둥이 엄마의 병실에 가니 할머니가 반색을 하며 같은 병실내 산모들에게 침이 마르도록 내 칭찬을 해대더니 갑자기 내 까운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는 나에게 얼마 안되지만 식사라도 하라는 할머니와 한동안 받으라느니 못 받겠다느니 실랑이를 벌였다. 얼굴이 홍당무가 된 나는 의사가 된지도 얼마 안되지만 사실 그때까지 소위『촌지』란 무엇인지 몰랐고, 또 받아본 적이 없어서 겸연쩍고 부끄러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간호원실까지 도망친 나는 간호원들이 한결같이 할머니의 성의표시니까 받는게 예의가 아니겠느냐는 설득에 그도 그럴 것 같아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금 5천원! 「레지던트가 아닌 인턴이 촌지를 받아도 괜찮을까」 하고 찜찜해하던 나는 간호원들의 제의로 몽땅 빵과 과자와 음료수를 사와 같이 수고하였던 사람들과 푸짐한 파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곧 뜻하지 않은 고민이 생겼다. 같은 병실 일반 산모들은 낮에 6시간 간격으로 혈압을 체크하면 되었다. 하지만 천둥이 엄마는 자간증 임산부였으므로 2시간 간격으로 체크하도록 오더가 떨어졌다. 천둥이 엄마만 더 자주 체크하러 드나들다 보니 일반 산모들에겐 천둥이 엄마만 특별히 자주 혈압을 체크해 주는 것처럼 보일까봐 엄청 신경이 쓰이고, 여간 거북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천둥이 엄마의 자간증 이유를 모르는 일반 산모들은 "저 사람 촌지를 받더니 천둥이 엄마만 더 잘해주는구나!" 하고 손가락질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침내 다음날부터는 그 병실에 들어가기가 싫어졌다. 생각하다 못해 다른 산모들을 체크할 때만 들어가고 나머지 천둥이 엄마 차트의 빈곳을 전후(前後)와 비교하여 비슷하게 그려놓았다. 결국은 뒤에 치프레지던트한테 들켜 혼이 났지만 차마 변명을 해댈 수는 없었다. 촌지란 이렇게 사람을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난처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후 어쩌다 촌지를 받게 되면 항상 마음이 켕기곤 하는 것이 아마 그 때문이리라.
× × ×
나는 내 진료실로 향하는 것도 잊은 채 할머니와 천둥이와 소아과 대기실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농담한대로 「천둥이」이라는 이름을 지어서인지 이처럼 큰 병없이 잘 자라고 있다는 것, 감기걸린 것 같아 병원에 들렀다는 것 등등..... 우리의 대화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서 흥얼흥얼 콧노래를 하다가 지루한 듯 하품을 하고있는 저 녀석이 내평생 최초로 작명(作名)을 해줬던 바로 그 천둥이란 놈인가 싶어 대견스럽게 보였다.
『천둥이 엄마도 안녕하시고요?』
그러나 할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갑자기 쓸쓸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작년 여름에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하나만 더 얻고자 했다가 그만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내사 몹쓸 시어무이지, 그때 욕심만 부리지 안했더라도.....』
『이 치분 겨울에 얼매나 고상이 많을꼬? 따순 봄되믄 손자놈과 지에미한테 가봐야지......』
전에는 그저 천둥이 학교에 들어가는 것만 보면 더 원이 없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장가들 때까지는 살아야지 않겠느냐며 씁쓸한 웃음 짓는 할머니, 금년봄이면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한다고 했다. 봄소풍도 엄마대신 따라가겠다면서 할머니 얼굴이 다시 밝아진다.
그래, 천둥아! 봄을 기다리자 새봄엔 할매손에 매달려 입학도 하고 할매랑 봄소풍도 가고 엄마한테도 가야지! 봄은 언제나 희망을 주는 것, 슬픔을 잊고 올해뿐만이 아니라 늘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살자!
진료를 마친 두 사람을 쌀쌀한 추위속으로 전송하면서 남다른 인연을 느껴 내몸마저 추위를 느끼는 것은 메마른 사회와 강추위에 찌들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아직은 봄을 기다리는 따스한 온기가 남은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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