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형칼럼
뼈도 못 추릴 운명을 만든

페이지 정보

작성자 압구정필
조회 391회 작성일 04-04-22 08:48

본문

(이글은 농협 압구정역지점장 이경환님께서 주신 글입니다.)

#1
“중화요리는 중국산 재료를 써야 제 맛이 나지 않겠어요?”
“아니지요, 한국에서 하는 중화요리는 역시 한국산을 써야 더 맛있지요!”
어느 날 중국집에서 같은 건물의 성형외과 김박사와 가진 점심시간.
요리를 기다리다 때 아닌 신토불이(身土不二) 논쟁이 빚어졌다.

“중화요리라도 한국에서 만드는 그리고 한국 사람이 먹는 요리이므로
역시 우리 입맛에 맞는 국산재료라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신토불이(身土不二)론에 귀결된 채 논쟁은 싱겁게 끝났다.
한마디 덧붙인 김박사의 말.
“우리 몸에 우리 먹거리가 좋다고 身土不二를 강조하듯이
우리나라 의사도 우리나라 사람의 몸(사체)으로
해부학을 공부하고 의술을 배워야 하겠지요?
그래서 몇 년 전 제가 한 신문에 신의불이(身醫不二)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어요.”

나는 그만 막 올라온 음식 그릇을 하마터면 엎지를 뻔 했다.
“그 칼럼을 쓰셨던 교수님이 바로 박사님이셨단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제가 뼈도 못 추릴 운명이 되고 만 것은
박사님 덕택(?)이었군요?”
"뼈도 못추릴 운명이라니요?"
김박사는 어안이 벙벙해 했다.

#2
시간은 1995년 어느 날로 거슬러간다.
우연히 신문을 주워 읽다가 ‘신의불의(身醫不二)’라는 칼럼을 읽게 된 것이다.
내용인 즉,
모 TV 탤런트가 뇌사상태에 빠지자 흔쾌히 신체기증을 하였다는 일화를 바탕으로 의대생들의 해부학 실습을 위해 사체(死體)가 있어야 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체 기증’을 별로 하지 않아,
심지어 수입한 외국인의 사체로 공부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여기에 외국인과 내국인의 체질이 달라 외국인의 사체로 공부한
의사에게 우리 몸을 맡겼을 때 올바른 의술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먹는 것에서 身土不二하듯이 의학에서도 身醫不二가 중요하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그 글을 읽고 난 시신을 기증하기로 마음을 먹게 됐다.
같이 일하고 있는 김과장과 직원들 6명에게 두 장을 수결(sign)받아
그 후로 지금까지 차 안에 한 장을 두고 또 한 장은 지갑에 넣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고 있다.

#3
“박사님!
제가 바로 박사님의 身醫不二라는 그 글을 읽고
시신을 기증하기로 결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남기는 말씀’이라는 유언장을 만들어
시신기증서와 함께 지갑에 넣어 다니고 있습니다”라며
유언장과 시신기증서를 보여드렸다.

내 아버님은 장례에 있어서 유교의 두꺼운 의식을 벗으시고
납골당을 만들어 매장문화에서 화장문화로 바꾸시면서
문중에 새 바람을 일으키셨지만, 아버님의 뼈는 내가 추슬러 뫼셨다.
그런 나에게 내 아이들로 하여금 내 뼈를 못 추스르게
의식을 변화시킨 것이 그 칼럼인 것이다.

그런 사람을 여기서 만나다니.
이건 보통 인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것도 운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박사가 글을 써 신문에 게재하고, 하고 많은 신문 중에서
하필 그 신문을 보게 됐고,
다른 사람보다 느낌의 강도를 크게 받고….

모든 중생이 부처님 손바닥 위에 있다는 말이 있는데
그럼 나는 김박사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인간인가?
천만 명이 넘는 서울 시민 중에서 이렇게 만나도록
그 누구의 각본대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란 말인가.

식사를 마치고 박사님의 소장품 중 그 칼럼을 복사했더니
신문 게재일이 1994년 9월 28일로 되어 있었다.
내가 그 글을 1년 여 뒤에 보았고,
이는 아마도 이사 오면서 이삿짐 포장용으로 따라온 신문이 아니었을까?

#4
김박사는 주변 친구들 대부분이 ‘시신기증’에 서약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내 결심의 이 증표로는 미흡하니 훗날 의사 앞에서
본인의 생각을 가족의 동의 하에 서약해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본인이 서약했어도 또 가족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

지난해 여름 ‘시신 기증’을 마음먹고
변죽을 울리는 얘기를 집사람에게 몇 번 해 보았다.
반응이 좋지 않아 여태껏 내 결심을 얘기 하지 못하다가
네 식구가 모처럼 모여 외식을 하면서
지금까지 읽었던 얘기를 죽 펼쳐놓으면서 눈치들을 살피니,
의외로 딸아이가 먼저
“아버지께서 그런 결심을 다 하셨군요”하며
놀랍게도 흐뭇하고 존경스런 눈빛을 띄고 격려를 해주었다.

그런데 그런 번거로운 절차를 이행 하려다 혹 마음이 바뀌지나 않을지, 집 사람이 썩 내키지 않는 마음인데 제대로 된 절차를 밟으러
언제 갈 수 있을지.
‘좀 더 눈치를 보았다가 실행하자!
칠순이 가까워 오면 딱딱하기로 소문난 마누라 이빨도 빠지겠지.
어쩔 수 없이 김박사님으로부터 뼈도 못 추릴 운명을 타고난 나인데….ꡑ

※주(註) : 시신을 기증하면 뼈를 못 추리는 것이 아닙니다. 의학연구용으로 이용한 후 모든 조직을 다시 원 상태로 추려서 맞춰드리므로 그대로 매장을 하실 수 있거나 아니면 화장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목에서 ‘뼈도 못 추린다’는 말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김잉곤-